누대로 내려온 보릿고개를 통일쌀 생산으로 쌀 자급자족의 길을 열었고, 농산물 시장의 개방에 맞서 고소득 작물을 개발하면서 농업 연구의 메카가된 농업진흥청이 수원을 떠나 전북혁신도시로 이전을 시작하면서 농진청 수원시대의 막이내린다.
농진청이 1962년 발족했지만 조선조 정조때 서호(농업용 저수지)를 만든 것부터 계산하면 2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농업의 메카인 셈이다. 또 일본이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한 1906년으로 거슬러가면 108년만이된다. 권업모범장이 해방 직전 농사 시험장으로 그리고 다시 해방후 농진청으로 바뀌면서 수원에는 한국 농업연구에 밤낮없이 매달린 수많은 농업연구가들의 땀이 서린 것이며, 특히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전신인 수원농림전문대학(3년째)가 1918년에 수원농고의 전신인 수원공립농업 학교가 1936년에 각각 문은 열면서 농업연구의 메카 노릇을 해왔다.
수원 농진청이 그동안 해낸 농업발전의 일들은 많은데 특히 최고의 일은 1980년대 ‘녹색혁명’ 이었다. 쌀이 부족해 일주일에 하루는 보리혼식을 해야했던 무마일 제도가 폐지된게 1977년이었다. 통일벼 생산으로 누대로 내려온 쌀 부족은 해결되었지만 1992년 쌀이 남아 돌면서 통일벼 수매를 하지 않았다. 농진청은 다수확 품종 대신 고품종 일반미를 육종하고. 10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냉해에 잘견디는 쌀 품종이 새롭게 개발됐다. 1990년에는 농산물 시장개방 파고에 맞서 화훼와 채소 등 고소득 작물의 ‘백색혁명’ 을 이뤄내는 성과도 있었다.
지난 21일 시작된 농진청 이전은 우선 본청이 이전하고 이어 국립농업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 등 4개 국립연 구원들이 내년 2월말까지 모두 이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