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의 군자 유진영 공 공적비 새로 건립

금광면 옥정리 주민들 공의 은혜 영원히 기려

 일본의 수탈과 6·25전쟁, 그리고 취약한 농촌 생산 구조로 인해 어렵게살던 시절, 많은 돈과 곡식으로 힘들게 살아가던 주민을 도운 참독지가의 선행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 아 공덕비를 세웠다.

 참 선행의 주인공은 당시 안성읍 영동에 살고 있는 천석꾼 유진영 공이다. 유진영 공은 금광면 옥정리 매남, 옥장, 연내 3개 마을 주민들에게 수시로 돈과 곡식을 아무 조건없이 희사하는 것에 감동한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주사 유진영 시혜 불망비(主事 兪鎭英 施惠겘亡碑)를 세웠다.

 공덕비 내용을 보면 현재 아공(賢哉我公), 구재휼궁(救 恤窮), 어질도다. 우리 주사공시여 주민들의 재액을 구제하고 곤궁을 보살폈구나. 청심과욕(淸心寡慾), 흡모고속(恰慕古俗) 깨끗한 마음은 욕심이 적으니 옛 풍속을 흠모했던 군자와 흡사하도다. 기연전재(旣捐錢財) 삼동뢰안(三洞賴安) 이미 재물을 내놓아서 세 고을을 편안히 살게 하였고, 우시미속(又施米粟)은 전심곡(恩鐫心曲) 또 다시 곡식을 베풀었으니 그 은혜를 마음속에 새기노라 라는 글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매남 유선근 이장은 “유진영 공의 은혜를 오래동안 잊지 못하였던 세 마을 주민들이 정성으로 세웠던 비석이 오랜 풍상과 재해로 뚝이 쓸려 나가면서 손상되어 모두들 안타까워 했다” 면서 “새로 비석을 세워 유진영 공의 훌륭한 인품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구제한 선행을 다시 알게 해주어 기쁘다” 며 비석을 세운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유선근 이장은 “옛날 만났던 유진영 공은 항시 검소한 생활을 했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고 회고했다. 유진영 공은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적극적 요청으로 1950년 5월 3일 시행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아깝게 당선되지 못했으며, 1960년 5월 28일 81세로 타계해 주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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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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